돈은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야깃거리(화두:頭)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생명을 유지해주는 필수장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돈이 없으면 먹거나 쉴 수 있는 장소를 구할 수 없으며,

이는 곧 살 수없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돈은 우리가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의 거의 모든 부분에 주인공으로 자릴 잡는다.

나를 포함한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돈을 벌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주제로 들어가 보자.

과연 우린 얼마만큼의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우린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How much money do we need to make?

How much money can make us feel happy?

 

 

처음 들어본 주제도 아니겠지만, 역시 답하기에 쉽지 않은 질문임에는 틀림없다.

The more, the better?

The more money we have, the happier we can become?

 

더 많을수록 더 좋다; (다다익선)

그렇다. 돈이란 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자.

 

꼭 돈이란 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만 한 것인지를....

내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당연히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라는 전제를 이미 깔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모른다! 가 아니라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돈을 벌어야, 혹은 가지고 있어야

우린 이 돈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난 이렇게 답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돈을 신발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봤다.

우린 신발을 고를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고른다.

운동화의 장점은 구두나 슬리퍼, 혹은 샌들 같은 신발보다 

일단은 편하고,

이단은 웬만한 장소나 상황에 어울릴 만큼 캐주얼하게 신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심지어 멋진 슈트에도 운동화를 신고 다닐 정도니,

정말 운동화의 착용범위는 때와 장소를 그다지 가리지 않는 듯싶다.

하지만 늘 운동화를 신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즉, 때와 장소에 맞게 신발의 용도는 다르며, 그러한 상황들에 맞게

신발을 착용해야 신발 본연의 목적에도 부합한다.

 

돈 이야기를 하다, 뜬금없이 웬 신발 이야기냐고 궁금해할 듯싶다.

이런 질문은 어떨까?

신발은 무조건 비쌀수록 좋은 것일까?

비싸면 무조건 멋지고 좋은 신발일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선 내가 경험하기론 대부분 비싸면 좋다.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모두가 비싼 신발을 원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늘 비싼 신발만을 신을 수도, 신을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From what I have experienced,

what costs a lot of money usually has better qualities, 

of course, not always.

Thought feeling bitter, I have no choice but to admit that.

However, what is important is that 

not everyone wants expensive shoes,

nor do they have to wear those all the time.

 

그러면 우린 어떤 운동화를 사야 하는가?

목적에 맞는, 그리고 원하는 취향과 능력에 맞는 운동화를 구매해야 한다.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이들에겐 실내에서 신을 수 있는, 

가벼우면서도 통기성이 좋은 제품이 필요할 것이며,

청바지에 맞춰 신을 스타일리시한 운동화를 찾는 이들에겐

고가의 나이키나 아디다스 운동화보단, 스니커즈 스타일이 더 어울릴 것이다.

등산하는 이가 30만 원 상당의 고급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산을 오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우연히 목격한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우와~ 부럽다."라고 생각하기보단

"미쳤나? 어떻게 저런 운동화를 신고 이런 산을 오르지?"라며 의아해할 것이다.

 

나는 돈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비싸면, 많으면 좋은 게 아닌, 목적(=삶의 방향, 가치, 추구하는 삶)에 

맞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So how much money do we need to make?

The more, the better?

No, I don't think so.

The amount of money we need relies on the value or the direction

of the life we're pursuing.

 

당신이 추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건 오롯이 본인이 결정할 몫이므로.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해서 보이는 가치에 방점을 찍는 이들은 그에 맞게

살아갈 것이며, 혹은 남들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만의 스타일로

사는 이들도 있다.

그냥 차보단 비싼 차, 국산차보단 외제차를 선호하는 전자(the former)의 인물들이라면

돈이 제법 필요할 것이며, 차를 몰기보단, 오히려 대중교통을 선호하며 걷기를

즐기는 후자(the latter)에 해당하는 이들은 자동차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돈을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아니다. 즉, 가치 판단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냥 선택할 뿐이다.

It's just a matter of choice.

외제차를 탄다고 나쁘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소박하고 멋진 것은 꼭 아니기에.

본인이 어떨 때 행복한 지를 잘 눈여겨봐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의 형태에 맞춰, 돈의 양을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외제차를 타고 싶으면 그에 걸맞게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그런 돈을 벌지 못한다면??

당연히 국산차로, 그리고 그런 능력조차 되지 않으면, 대중교통이나 자전거,

혹은 도보를 이용해야 한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본인이 원하는 삶은 생각해보지도 않은 체,

단지  원룸에 기본으로 들어가 있는 세탁기처럼,

으레 자동차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지난 글에도 적었듯이, 일단 '필요(need)'보단 '원함(want)'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결국 단순히 원하는 물건으로부터의 행복은 그 양과 기간이 제한돼 있다.

결코 피할 수 없다.

 

The amount and length of happiness from the materials you don't need

, which you just want, is limited.

It's inevitable.

 

그토록 원하던 물건을 구입하는 바로 그 순간, 그 기쁨의 최대치를 찍으며

그 이후론 서서히 줄어드는 게 아닌, 급감하며 폭락하는 게 바로 물질로부터 오는 행복이기에.

물질과는 상호작용이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혼자 즐거워하다, 혼자 식어버린다.

 

돈의 양을 결정하기 전에, 원하는 삶의 방향을 결정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삶의 방향, 삶의 형태에 따라 필요한 돈의 양을 결정하고,

그에 맞춰 노력해서 필요한 양의 돈을 얻길 바란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양만큼의 돈을 얻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그에 맞춰 삶의 형태도 수정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무작정 돈은 많으면 좋다는 생각일 것이다.

신발장에 고급 브랜드 신발들을 종류별로, 브랜드별로 가지고 있어 봤자

결국은 한 번에 한 켤레의 신발만 신을 수 있으며, 

운동화가 30켤레 있어봤자, 결국은 신발장의 크기만 커질 뿐이다.

 

결론은 결국

얼마만큼의 돈이 좋은가,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야 하는가는

당신이 어떤 삶의 살고 싶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그러기에 우선 당신이 삶고 싶은 삶의 모습을 잘 생각해보자.

 

Most importantly, you have to decide what life you want to live in the first place

rather than how much money you want to make.

The amount of money you need is dependent on what life you'd like to live.

 

 

그런 삶에 대한 생각은 안 하면서 무작정 닥치는 대로 신발을 사모으는

단순한 신발(=돈) 컬렉터(Money Collector)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본주의 (資本主義) [자본주의]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서 소유한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위하여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사회 경제 체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면 가장 위쪽에 뜨는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입니다.

자본주의는 제 방식으로 풀어 설명하자면, '자본', 즉, '돈'의 축적을 허락하는 사회입니다.

그 액수에 상관없이 말이죠.

 

자본주의=돈의 축적량=권력

 

이렇게도 연결됩니다. 인정하기 싫어도, 실제 자본주의 사회는 이렇게 정의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갖기 위해선, 막대한 양의 부의 축적이 필요하고,

반대로 막대한 양의 부를 축적하고 나면, 힘과 권력이 생기죠.

 

오늘 제가 끄적끄적 나누고픈 얘기의 주인공은 '자본주의'와 '뷔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의 축적이 인정되고, 

축적되는 부의 양이 늘어갈수록, 더욱더 많은 부를 끌어들일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The more money you have, the more money you can make."

마치 크기가 커지는 '자석'과 같다고 생각하면 될 듯싶네요.

손톱만 한 자석이 손바닥만 해지면, 끌어들일 수 있는 철가루의 양도 그에 비례해서 많아지고,

심지어는 자동차 정도도 거뜬히 들어버리는 대형 자석도 있습니다.

 

부를 가지고 있는 않는 서민들이 작은 쇳조각이라도 주어서 팔려고 하루 종일

발품을 팔며, 고개를 숙여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릴 때,

부를 축적한 이들은 자석으로 그 모든 쇳덩이, 쇳가루까지 끌어가 버립니다.

 

즉, 이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부(자석)을 가진 이와, 그렇지 못한 이들은 태생적으로도, 그리고

시스템적으로도 결코 같은 선(level)상에 놓일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주인공인 '뷔페'이야기로 들어가 보죠.

 

위에서 길게 언급해 듯이, 이 세상,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자본주의'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습니다.

있는 이는 더욱더 많은 부와 풍요로움을 누리고, 없는 이들은 더욱더 가난이라는

늪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죠.

 

그런데 전 이 자본주의의 불공평함을 뷔페에 갈 때마다 느낍니다.

이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뷔페 음식점입니다.

전 서민입니다.

그래도 서민 역시 2만 원 남짓한 뷔페 음식점은 가끔 방문할 수 있죠.

보기만 해도, 뭐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하는 뷔페 음식점에서 눈보다 새하얀 접시 위에

형용색색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을 담아, 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하죠.

그런데 그럴 때마다, 어떤 장면이 떠오르며, 전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역시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그 장면이 어떤 장면이냐고요?

여러분도 가끔 봤을 겁니다.

아프리카에서 먹을 물도 없어서, 수 십 미터 바닥을 파고 들어가 겨우 퍼 올린 흙탕물.

혹은 십수 키로를 걸어가서 겨우 얻어온 흙탕물.

너무나도 목이 마른 나머지, 우리라면 세탁물로도 사용 못할, 겨우 텃밭에 주는 용도로

사용할 법한, 그 흙색의 누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아이들.

그리고 당연히 병에 걸려 죽음과 삶의 문턱에서 힘겨워하는 이들.

 

그런 세상 저 편의 흙탕물을 마시는 삶은 뒤로 하고, 우리는 에어컨이 있어 시원한, 

아니,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한 식당에서, 접시 위에 음식의 산(山)을 쌓아

쉴 새 없는 잡담과 더불어 호화찬란한 음식의 향연을 즐깁니다.

 

그리고 그 '음식의 더미'의 절반을 그냥 접시 위에 버려둔 채, 다시 새로운 음식의 

산을 찾아 탐험가의 마음으로 새로운 접시를 집어 듭니다.

 

역시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음식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

마실 물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

"This world is not fair.

There are some dying without any water to drink,

there are some dying without any food to eat."

While there are others who leave the food they were eating on their plate

as they look for something they haven't have yet.

 

그런데,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의 비로 자라온 우리는

배가 불러서, 음식을 버리고,

누군가에게는 마실 물로, 발가락 사이의 먼지를 닦아냅니다.

 

우린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인생은 불공평한테 어쩌란 말이야??라고 말하며,

계속해서 그 넘치고 넘치는 풍요로움을 즐기면 될까요?

 

뷔페식당에 가면 그래서 전 이렇게 다짐합니다.

"그래, 이런 뷔페 음식점에 올 수 있다는 건 행운이야.

이것까진 미안해하지 말자. 하지만, 적어도 그 풍요로움을 낭비하진 말자."라고요.

 

이미 먹어봤거나, 확실히 먹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음식을 결코 남기지 않을

양으로 담아옵니다. 그리고 결코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음식 조리 상태가 이상하거나, 기타 먹을 수 없는 이유가 있으면

조금 남길 때도 있지만, 거의 빈 접시로 남깁니다.

 

그게 제가 이 풍요로움으로 포장된, 불공평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구 저 편에서 먹을거리가 없어, 죽어가고 있는 같은 종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영화 '부당 거래'에서 나온, 제가 무척이나 자주 애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

"continued hospitality can be mistaken for a given right"

"You can do 99 things for someone and  all they will remember is the one thing you didn't do."

 

그렇지 않나요?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이 계속되니, 그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지 않나요?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습니다.

"You must not take anything for granted."

사람의 호의건, 돈만 주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건,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습니다.

 

주어진 호의에, 음식에 감사하며 살 일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어른의 뜻은' 다 자란 사람. 또는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있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성인은 '자라서 어른이  사람. 보통  19 이상의 남녀를 이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전 각 단어의 정의에서 두 번째 부분에 좀 더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즉, 어른은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성인은 '보통 19세 이상의 남녀'라는 뜻으로 말이죠.

 

제가 보기엔 이렇습니다.

성인은 일단 만 19세 이상, 흔히 말해 20살이 되면 자동으로 달게 되는 명찰 같은 것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자격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일단 20살이 넘으면 우리 사회에선 성인이란 명칭을 붙여주죠.

그리고 그 '성인'이 되면 흔히 이제 부모 허락을 구하거나, 눈치 보지 않고 술, 담배를 구매해서 마시거나 피우고,

맘대로 이성교제를 하고, 외박 및 기타 등등도 가능하죠.

 

우리나라에서 성인은, 적어도 제가 느끼기엔, 이런 느낌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살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오직 두 가지 프레임 안에 갇혀 삽니다.

첫 번째는 '공부', 즉, '좋은 대학교'라는 틀이죠.

청소년기에 이뤄지고 있는 교육의 대부분은 바로 이 '좋은 대학교'를 위한 것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첫 번째 목표를 위한 틀,

다시 말해, '하지 마라, 하지 마라, 안된다,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참아라'라는 프레임이죠.

거의 모든 학부모와 학생들은 이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죠.

 

사정이 그렇다보니, 청소년들이 20살이 되는 순간, 그들은 '자유'를 얻게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유'란 위에선 말한, 이젠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과 일치하죠.

슬프지만 현재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성인의 개념은 사전적 의미와 다릅니다.

20살만 넘으면 자동으로 생기는 '명칭으로써의 성인'이 아니라,

적어도 이젠 '부모의 보살핌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사람'

 

즉, 20살이 넘으면 이젠 부모님의 보살핌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정상 독립이 어려우면, 혹은 부모님과 같이 살 이유가 충분하다면,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것에 대한 생활비와 월세를 지불해야 한다!

 

독립해서 혼자 사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혼자 나가서 살게 되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말해 '현실'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죠.

야생 그 자체가 아니던가요? '사회생활'이란???

 

숨만 쉬어도 매달 기본적으로 나가는 월세니 생활 비니...

결코 만만치 않은 고정비용으로 인해, 온실 밖 삶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거죠.

즉, 자기 앞가림은 이제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하는 상태.

이 상태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성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비교해서 '어른'의 개념은 어떨까요?

흔히 우리나라에선 유교의 영향이 아직도 많이 남은 탓인지,

'어른'하면 왠지 '연장자'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이 많으면 어른! 정말 그런가요?

소위 나이는 숫자의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숫자의 개념은 '나이 들었다고 해서, 결코 젊은이들이 하는 일을 못한다는 법은 없다.

나이라는 숫자의 틀에서 벗어나, 본인이 원하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해라.'라는,

연장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일종의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숫자만 먹은 것이죠.

40이든, 50이든, 숫자만 먹은 성인, 혹은 숫자만 먹은 나이 든 사람!! 이 될 수도 있습니다.

40이 넘어서도 아직 '성인'의 딱지 조차 떼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40을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도 부모에게 '빌붙어; 이보다 더 좋은 단어를 생각 못하겠네요'

사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들은 '어른'은커녕, '성인'의 영역에도 발을 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이라는 숫자'개념에 너무 얽매이진 않았으면 합니다.

 

자,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어른'의 개념이 궁금하실 겁니다.

뭐 특별하진 않습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국어사전의 정의와 거의 비슷합니다.

성인이란 자격을 갖춘 자로서, 자기 일, 나아가선 타인과의 약속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죠.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 의지' 전 이것을 어른을 일반 성인과 구분하는 기준점이라 생각합니다.

 

성인이지만, 어른이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죠.

저 역시 어느 범주에선 어른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저 혼자 몸은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선 책임을 질 순 있지만,

전 가족이란 보금자리를 형성하고, 그들을 책임질 만큼 어른은 아니라는 걸 압니다.

그래서 전 결혼을 못하죠. 솔직히 말하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아니,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서 가족의 생계를 위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가장이 돈을 벌지 않으면, 가족의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죠.

전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죠.

 

자기 외에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 때, 전 '어른'이란 단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봅니다.

하지만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얼핏 들으면 가족을 이룬 모든 성인들이 '어른'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결단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어른이 되지 않는 상태로 결혼을 한 이들이 넘쳐납니다.

혹자들은 얘기합니다. "결혼하면 어른이 된다고. "

 

아니, 제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죠.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듣고, 직접 경험한 바로는

어른이 되지 않는 상태로 결혼한 이들의 가정생활은

그리 순탄치 만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 조차 책임질 수 없는 이들이,

타인의 삶을,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책임지려다 보니, 슬픈 일들도 일어나곤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세요??

적어도 자기가 선택한 일이나 행동에 대해서 전부 책임질 능력과 준비가 됐나요?

 

쓰레기통이 가득 찼다고 바닥까지 빨아먹은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버리고 가는 사람.

혹은 쓰레기통 주위에 그냥 버려두고 가는 사람.

피울 땐, 온갖 똥폼은 다 잡더니, 정작 아무 데나 꽁초를 버리고 가는 이들.

아무 생각 없이, 준비 없이, 본능을 충실한 결과로 나은 아이를 버리는 부모라는 가죽을 덮어쓴 이들.

지키겠다고 약속해 놓고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기는 이들, 

심지어 기억조차 못하는, 아니, 안 하려는 사람들!!

 

이들 무리 속에 여러분은? 저는? 안 들어가나요??

 

우리 어른이 됩시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해, 하겠다고 다짐한 약속에 대해선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됩시다.

세상 모든 일에 대해,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지라는 건 아니잖아요?

적어도, 나 자신의 삶에 대해, 내가 책임 질 의무를 지니고 있는 이들에 대해,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더불어 앞으로 하겠다고 약속한 일에 대해..

여기에 덧붙여, 아주 사소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위와 같은 행동들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있는 우리 '어른'이 됩시다.

 

숫자로만 나이를 먹은 그런 늙은이가 아니라 말이죠.

 

 

요즘은 영어단어가 번역 없이 그 자체로 한국말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무래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어라는 언어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실용적인 목적이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강요 아닌 강요의 문제든 간에.

 

그중 하나가 바로 '니드(need)'라는 단어가 아닐까..

굳이 수능이나 토익 같은 특수목적을 가진 시험을 보지 않더라도,

유명 강사나 혹은 그들처럼 유명하지 않은 많은 이들도 이 '니드'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사용하는 것을 본다.

 

말 그대로 '필요함'이란 뜻을 지닌 '니드(need)'!!

그런데 이 단어가 등장하면, 반드시 함께 따라붙는 다른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want(원함)'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원함!  VS  필요함!

 

단순히 글자 자체를 놓고 비교해보아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 두 단어의 어마무시한 차이를..

필요함은 문자 그대로 없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원함은 혹은 어떤 특수한 목적이나 계획이 없이 그냥 순간적으로, '당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떡볶이를 보며, "아, 맛있겠다. 먹고 싶네!"

쇼윈도에 진열된 자기 스타일의 옷이나, 자동차를 보며,

"와~완전히 내 스타일인데!! 진짜, 입거나 타고 싶다!"라고 드는 마음!

 

그게 바로 원함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 '원함'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단순한 '바람'이다.

물론 있으면 그 순간은 만족스럽겠지만, 없다고 해서 슬프거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불편한 그런 대상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니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니드는 위에서 말했듯이 없으면 안 되는, 꼭 필요한 그 무엇이다.

물론 니드 역시 사람마다 니드의 종류나 그 개념은 다르겠지만,

각각의 개인에게 있어 니드는 단순함 원함을 넘어선,

삶을 풍요롭게 하고, 반드시 추구해야 할 그 어떤 '대상'인 것이다.

 

원함을 쫓은 삶을 살다 보면, 그 대가로 얻는 건 허무함, 혹은 공허함이다.

즉, 그 순간은 행복지수가 급상승할 순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만족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떨어지고 만다.

 

While 'Want' gives you instant, temporary pleasure, it doesn't last long in most cases.

Whereas 'Need' helps us feel long-lasting satisfaction, as it is essential in our lives.

 

지금 이 순간 본인의 경험을 잘 떠올려 보자.

충동구매야 말로 원함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충동구매를 통해 소유한 물건이나, 대상이 본인의 삶을 풍요롭게 한 적이 있던가?

물론 세상에 예외란 단어는 늘 존재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충동적으로 획득한 그 무엇이 반드시 후회를 낳는다거나,

필요 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끔 충동구매든, 혹은 아무 계획 없이 어떤 물건을 샀음에도, 소위 말하는

'득템'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가운데, 

그 순간적인 '당김', '원함'으로 행복한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잘 생각해보자.

방 한 구석 어딘가에 있는 지도차 모르게 공간만 차지하고 있다가,

몇 년 후, 100L 쓰레기봉투에, 혹은 재활용 상자로 유명을 달리한 물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풍요로움으로 포장된 자본주의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따스함을 공유할 수 있는 가정이지만,

우리는 평당 분양가가 웬만한 자동차 한 대 값을 호가하는 아파트를 원한다.

가까운 공원이라도 불편함 없이 데려다줄 수 있는 자동차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벤츠, BMW 같은 외제차를 타며 뽐내고 싶어 한다.

 

이 시대의 많은 부모들은 '건강하게, 네가 원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라는 니드를 뒤로 하고,

SKY 같은 유명대학을 나와, 좋은 곳에 취직해서 많은 돈을 벌고, 편히 살길 바란다. 

그러면서 더 개그스러운 건, "이게 다 너흴 위한 거야!"라고 포장하며 자기 위로를 한다.

 

필요함과 원함의 경계선이 무너져 버린 지 오래다.

아니, 그 개념조차 구분하려는 노력도 없으며, 그래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는 듯싶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있어, 꼭 필요함은 무엇인가?

당신을 당신답게 살아가게 해 줄, 

언젠가 반드시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할 우리들이 

'잠시 동안 주어진 이 삶이라는 열차' 안에서 추구해야 할 니드는 무엇일까??

 

We don't have eternal life.

Life is just a journey, which might last longer than we expect or vice-versa against our will. 

We're just given a temporary life before we get to the terminal of life.

Let's not waste it indulging so many 'wants'.

It would be an advantage for us to look for 'Need' and enjoy it.

 

 

꼭 지금 당장 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원함과 필요함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살아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지만,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게 또한 우리 삶이지 않는가...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화려한 그 '원함'보단,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 '니즈'를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

 

'니모를 찾아서'가 아니라 '니즈를 찾아서'

 

 

 

 

 

 

 

 

몸이 아픈 곳이 많아 한방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경험입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를 닦으러 가는 중에 열린 문틈으로 우연히

어떤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어림잡아 70대 후반 정도의 어르신이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본인이 직접 하시는 게 아닌 누군가가 떠먹여 주는 밥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엄마처럼, 그 여자분은 허리를 조금 굽힌,

제가 보기엔 조금은 불편한 자세였지만, 열심히 어르신에게 식사를

떠먹여 드리고 있었습니다.

딱 봐도, "따님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 든 노부( )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딸의 모습은,

흡사 2~3살짜리 어린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는 엄마의 모습과 겹쳐지더군요.

그런데 그 모습이 정말이지 아름다웠습니다.

 

나이가 든 데다, 어제 기력마저 없어, 숟가락 조차 들기 힘든 그 아빠는

어렸을 적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담아 떠먹여 주셨을 테죠.

불편한 자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행여 밥알이라도 흘릴까 점심식사를

떠먹여 드리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그 따님에게 말이죠.

 

이제 그 꼬맹이 딸이 나이 들어 어엿한 어른이 되었고,

꼬맹이 딸에게 밥을 떠먹여 주던 그 아빠는 지금은 나이 들어,

본인 스스로 숟가락 조차 가누기 힘든 나이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애가 되기 마련이죠.

그런데 이렇게 애가 되는 것은 그다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이 들어 힘이 없어지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순리일 테죠.

그 순리를 거부하지 않고, 그렇게 힘이 없어 밥이 떠먹여 지는 상황을

마다하지 않고, 인정하며 식사를 즐기면, 그것 또한 행복일 테죠.

 

저는 결혼을 하지 않아 아이가 없어 이런 호사를 누리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감사히 받아들여야겠습니다.

 

나이가 들어 애가 됐을 때 말이죠.

 

 

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 생각엔 그런 것 같습니다.

40대 중반인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빌어서 생각해봤을 때, 그런 것 같습니다.

 

40대 초반에 암수술을 받고 요양병원에서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같은 병원에서 저보다 훨씬 오랫동안 지내신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뇌출혈로 인한 하반신 마비로 인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셨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무척이나 건강한 분이셨습니다.

전 그 누님과 대화하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는데요, 유머 코드도 너무 잘 맞았고,

긍정적인 데다가, 누님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그 요양병원에 오랫동안 계셨는데, 같은 병실을 쓰는 분들이 거의 대부분

연세가 많은 분들이었습니다.

 

햇살 좋은 어느 봄날, 그 누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동생, 그거 알아요? 나이가 들면 에너지가 달리고 에너지가 달리면,

감정을 여과시키거나, 혹은 절제하지 못하고 곧바로,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게 돼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겨요."

 


딸리다: 달리다(재물이나 기술,  따위가 모자라다) 잘못.


쉽게 말해, 에너지가 있으면 본인에게 기쁜 일이 있어도, 옆 사람 눈치도 봐가면서

적당히 기뻐하고, 티를 내거나 혹은 안내기도 한답니다.

혹은 화가 치밀어올라도, 어느 정도 참고, 한 템포 쉰 다음에, 분노의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른 후,

여과해서 밖으로 내보내는데,

나이가 들어 기력, 즉, 에너지가 달리면, 그런 모든 감정표현을 상대방의 상황이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기분 가는 대로 내뱉는답니다.

마치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저런 말들을 내뱉듯이 말이죠.

그 결과는 당연히 상대방에게 많은 감정적, 정서적 상처를 남기게 되죠.

 

그런데 이 에너지의 부족이 꼭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옆 병실을 쓰고 있던 형님 한 분이 항암치료를 받고 오셨는데,

에너지란 에너지는 바닥이 나서, 말할 힘도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넨 아직 에너지가 넘치는구먼.

내가 만약에 항암치료받고 올라와서, 자고 있는데 저 영감탱이가 나를 그런 식으로 깨우면

난 아마 저 영감탱이를 가만 안 뒀을 거라고..."

 

무슨 말이냐면, 저와 같은 병실을 쓰고 계시던 영감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병원에선 '싸움닭'으로 불리셨습니다.

늘 이 사람, 저 사람과 말다툼으로 하루를 보내셨던 분이죠.

생긴 건 참 점잖고, 잘 생기셨었는데...

그분이 꼭두새벽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셔서, 아직 꿈나라인 저를 깨우시려고

제 침대를 지팡이로 두드리셨죠.

전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무시 전략'으로 일관했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형님들이라,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누님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알겠더군요.

전 화가 치밀어 올라도, 절제할 수 있고, 한 템포 쉴 수 있는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노인분들은 쉽게 화내고, 쉽게 울고 웃습니다.

말 그대로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시는 것이죠.

제 방식으로 바꿔 말하자면, 감정을 여과할 에너지가 거의 바닥난 상태라,

아무 생각 없이,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죠.

 

마치 애들처럼,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여건을 고려할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은 상태니까요.

 

이제 여러분에게 당부드립니다.

비단 이 이야기가 요양병원에 있는 나이 드신 분들이나, 중증환자 혹은 암환자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이 험난한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에너지가 바닥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어느 날, 운전하다 끼어드는 앞 차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육두문자를 입 밖으로 나오진 않나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화가 나서 본인도 모르게 그만, 말을 함부로 하진 않았는지요?

 

친한 친구나 가족의 사소한 실수에도 엄청나게 화를 내며 과잉 반응했던 적은 없었나요?

만약 그랬다면, 여러분 역시 자신의 에너지가 바닥났다는 사실을 일단 인지하셔야 합니다.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선 타인에게 심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큰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좋은 음악이나 영화, 맛있는 음식, 좋은 사람과의 맛깔난 대화,

자신만의 힐링 장소나 맛집, 혹은 좋은 글들을 통해 바닥이 드러난 '에너지란 저수지'를 채우셨으면 합니다.

 

에너지가 바닥나면 여러분도 나이와 상관없이 아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셨음 합니다.

 

 

 

 

 

 

흔히 근육 하면 몸에 는 그것만을 생각할 듯싶습니다.

늘 느끼는 바지만, 눈에 띄는 것들은 쉽게 확인도 가능하고,

눈에 띄기 때문에, 늘 신경을 쓰는 편이죠!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는 거??

네, 분명 마음에도 근육이 있습니다.

 

근육과 근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근육이 있어도, 근력, 즉, 근육의 힘이 없는 경우도 있고,

내 몸에 있는 근육이어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내 몸인데 왜 내가 내 맘대로 근육을 못 움직이는데??"

라고 생각이 드신다면, 지금 당장 이렇세 해보십시오.

 

양쪽 귀를 움직여보세요! 움직이나요?

물론 움직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열에 아홉은 안됩니다.

왜일까요? 

분명 귀도 근육으로 이뤄졌고, 그 근육을 움직일 수 있어야 비로소

귀도 움직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안 움직이죠?

네, 비록 내 몸에 있는 근육이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그 부분의 근육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근육은 어떨까요??

네, 마음에도 분명 다양한 근육이 있고, 그 다양한 근육들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으면, 몸의 근육과 마찬가지로, 맘대로 움직여지질 않습니다.

마음의 근육이 약화되면, 당연히 근력도 약화되겠죠?

마음의 근력이 떨어지면, 가벼운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세상 모든 일들이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죠.

 

마치 허리의 근력이 약해지면, 허리가 아프고, 걷기가 힘들고,

팔의 근력이 약해지면,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잡는데 어려움이 생기듯이...

 

하지만 희소식이 있습니다.

몸의 근육은 좋은 음식과 더불어 규칙적이고, 나이와 환경에 맞는

적절한 운동을 통해 향상될 수 있으며, 근력이 약화되는 속도 또한 늦출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근력도 연습을 통해 강화될 수도 있고, 또한

근력이 약해져 가는 속도도 어느 정도 조절 가능하죠.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스쿼트'라는 다리 운동을 통해,

엉덩이와 다리 근력이 향상되고, 자전거를 꾸준히 타면,

허벅지의 근육과 근력이 향상됩니다.

또한 몸에 해로운, 예를 들어, 음주나 흡연 같은 것을 피하면 이 효과는 더불어 상승하죠.

 

마음의 근력은 그렇다면 어떻게 단련할 수 있을까요?

바로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거짓 없는 웃음, 좋은 글, 음악, 영화!!
이렇게 마음에 양식을 꾸준히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마음을 아프게, 혹은 공허하게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자제하거나

끊고, 정서에 해로운 글이나, 영상 등은 최대한 피하면 시너지 효과가 나겠죠?

 

오래 알았다고 해서, 혹은 정이 들었다고 해서 누군가와의 만남을 이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아는 사람이 친구가 되기도 하고, 친구였던 이가 아는 사람,

혹은 남이 되어 살아가기도 하니까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얼핏 생각하면, 슬프고, 두렵기도 한 일 같지만, 결국 보폭이 다른 사람은 함께 걸어갈 순

없는 노릇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혹시 뭔가 마음이 텅 빈듯한, 말 그대로 공허함을 느껴본 적은 없나요, 여러분은?

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 허한 기분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하고, 공허합니다.

함께 할 수 없는 이들과 함께 하려다 보면 오히려 마음에 독이 됩니다.

 

마음의 근력을 키우고 싶다면, 

마음에 독이 되는 이들과의 만남, 부정적인 글귀나, 영상을 피하세요.

대신,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눌 수 있고, 가면을 쓰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이들과의 만남에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사용하시는 건 어떨까요??

 

마음의 근력은 유지되거나, 혹은 향상될 것이며, 에너지가 넘치지는 못할 망정

적어도 바닥난다는 느낌(;Feel drained)은 없을 것입니다.

세차를 하다 문득 드는 생각!
자동차를 물과 비누 타월로 깨끗이 씻고 난 후에는 극세사 타월로 차 표면의 물기를 제거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얼룩이 남기도하고, 물이 마르기 전에 먼지가 달라붙어, 
세차를 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으로 직접 세차를 하다보니, 알게 된 내 나름대로의 팁이라면 팁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물기를 제거할 극세사타월을 미리 물에 적시고, 물기를 한 번 짜준 후
차를 닦으면 물기가 바로바로 흡수된다는 사실!!
"에이~그게 뭐 대단한 팁이야?"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직접 손세차를 해본 사람들은 공감하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 싶다.
잘 말려진 극세사 타월은 처음에는 자동차 표면의 물기를 전혀 흡수하지 못하고
물기가 수건 위를 겉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타월이 약간 젖으면서 비로소 물기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수건을 물에 한 번 흠뻑 적시고 나서, 손으로 꽈~악 짜준 후,
물기를 닦기 시작한다. 당연히 자동차 표면이든, 유리창이든, 물기가 없어지는 게 눈에
확연히 드러난다.

순간 이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감수성(感受性; sensitivity)'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이야기나 행동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 빠르다.
마치 살짝 물기를 머금은 극세사 타월이 차 표면의 물기를 순식간에 흡수하는 것처럼,

곧바로 타자(他者)의 감정을 흡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수성이 부족한 이들은 타자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거나,
혹은 전혀 이해를 못할 수도 있다.
마치 너무나도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바짝 말라버린 극세사 타월처럼....

살다 보면,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이 건조해지기 마련이다.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건조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감수성'도 메마르기 쉬운 것도 매한가지다.
피부가 건조하면 누구나 곧바로 알아차리고, 보습이라는 것을 해준다.
하지만, 마음이 메마른 상태는 눈에 보이지 않아, 곧바로 알아채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마음 역시 8월 극심한 여름 가뭄에 갈라져 가는 논바닥처럼
쩌~억, 쩌~억 소리를 내며 금이 가고야 만다.

감수성이 메마르면, 바짝 마른 극세사 타월이 자동차의 물기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듯,
마음 역시 타자의 이야기나 상황에 쉽게 젖어들지 못한다.
다시 말해, '공감(共感)이 안된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관계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게 바로 이 공감하는 능력, 
혹은 공감하려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감이라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므로!

아무리 좋은 수건이라도, 처음에는 물기를 잘 흡수할 수 없지만,
몇 번 삶기도 하고, 세탁기에 돌리고, 세월을 거치다 보면, 샤워하고 나온 후
온몸에 남아있는 물기를 '순삭'시켜 뽀송뽀송한 피부로 만들어줄 만큼
내공이 있는 타월로 변모를 하는 것이다.
순삭; ‘순간 삭제’를 줄여 이르는 말로, 어떤 것이 매우 빠르게 사라짐. 
게임에서 캐릭터가 빠르게 죽을 때 쓰던 말에서 유래하였다.

감수성이 풍부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메마르진 말아야겠다.
'내가 저 상황이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마르지 않는 감수성의 비밀은....

누군가의 이야기나 상황을 접할 때, 마음속 한 구석으로
본인도 모르게 "왜 저렇게 살지?, 왜 이렇게 안 하지? 왜? 왜?"라는
생각이 잠재해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며,
자신이 실제의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의 양보다 많이 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거기에 한 술 더 떠,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타자의 이야기를 접하는 순간 의식하지 못한 체, 듣고 싶은 이야기만 편식해서 듣게 되며,
공감은커녕, 판단하고, 심지어는 단죄(斷罪 )를 하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기를 머금지 못하는 수건은 사랑받지 못한다.
타자의 감정을 머금지 못하는 사람 역시 환영받을 순 없을 것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행복할까?
나의 입장을 상대방의 입장에 놓아보는 것: 
Trying to put me in someone else's shoes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메마르지 않은 감수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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